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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의 목적 : 현실의 대립이 지니는 모순을 극복하기 위하여

 

 틸리히의 초기 종교철학 주요 저작인 <종교철학이란 무엇인가?>는 종교적 현실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모순을 드러내어 비판하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역설을 주장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모순의 대립 양항들을 지양하는 것이 아니라(헤겔의 종합의 방식이 아니라) 모순의 대립 양항들의 긴장을 싸안으면서 종합함으로써 보다 크고 넓은 입체적 구도로 현실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헤겔에게서의 종합의 방식은 지양이었다. 하지만 틸리히에게서 종합의 방식은 역설이었다. 양항의 극복이라는 명분으로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싸안고 넘어서야 할 것이었다. 그래서 상호관계이고 이것이 지속적으로 작동하려니 체계가 필요했던 것이다. 따라서 틸리히는 이를 "체계적 역설(systematic paradox)"이라고 부른다.

 틸리히가 체계적 역설을 통하여 다양한 현실의 의제를 들추어내는 기본적인 구조는 자율-타율-신율이라는 삼각구도이다. 자율에 빠지면 자기도취로, 타율에 빠지면 우상숭배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데 여기서 신율은 우상 파괴와 자기 비움의 경지로 끌고가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신율은 위로부터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자율과 타율의 대립을 극복하는 포월적 역설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대립하는 양항을 종합하려는 시도는 적어도 근대 초기에 인식행위의 주체가 새로이 등장하면서 전통 형이상학의 실재가 객체가 되고 서로 마주하면서 벌어진 대립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엮어보려는 시도에서 시작된다. 근대 전기와 후기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는 전기에서 주체와 객체의 관계 설정을 위해 양자 사이의 거리가 관건이었다면, 후기에 와서는 그러한 거리에 의해 한쪽으로 쏠리는 일방들을 잡아 이으려 시도했다는 것이다. 서로 대조적인 일방을 각각의 반쪽으로 보고 이으려는 시도를 시작한 사람이 칸트이다. 그런데 칸트는 그렇게 인식을 이어놓고 존재에 대해서는 '물자체 불가지론'으로 그 경계를 그어버렸다. 인식 저편의 존재는 알 수 없다고 하면서 말이다.

 피히테, 쉘링 그리고 헤겔(독일관념론)은 대립적인 모순이 앎(인식론)뿐 아니라 있음(존재론)에도 있다는 발상을 이어가며 완성한다. 앎만 쪼개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있음도 그렇게 쪼개져 있어서 대립들 사이의 충돌이 벌어지는데 이를 극복하는 방향으로 계속 움직이고, 앎도 그러하다가 있음과 앎이 결국 만나게 된다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즉, 근대 전기 주체와 객체로 갈라져 대립하던 것에 대한 종합이 칸트에서부터 작은 규모로 시작하였는데, 모양새는 다소 달랐어도 점차로 범위를 확대하면서 대립을 종합시키려 하는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종합은 현대까지 이어졌다. 현대에서 근대 전기 사람들이 왜 그랬는가를 돌이켜보건대, 고대 형이상학 시대의 있음에 대해서 앎이 시작되니 있음의 통로 내지 수단/방법으로서의 앎이었다. 그러한 앎의 길은 있음을 잘 모시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려니 복잡한 가닥들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게 중요했다. 이것이 인식론이다. 그런데 그것들이 부분적이고 지엽적이라는 것을 이내 발견하게 되었고, 이를 물려받은 후기에 더 큰 이야기로 묶으려는 시도들이 벌어졌다. 틸리히는 이를 받아서 '긴장과 충돌'이라고 표현했다. 긴장은 본질적인 차원에서 양극이 균형을 이루고 있음으로 좋은 것이다. 하지만 이런 균형이 깨지면 긴장은 충돌이 된다. 그리고 한쪽으로 쏠리면 자아도취와 우상숭배와 같은 왜곡이 일어난다. 인간이 본질(긴장)에 머물러 있지 않고 실존으로 소외된다고 표현한다.

 

종교철학의 방법 : 모순에서 역설로 전환하기

 

 

폴 틸리히, <종교란 무엇인가?> 목차 (출처: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

 틸리히의 <종교란 무엇인가?>는 그의 종교철학의 기본 구도를 짜는 1부와 개념을 문제로 비판하는 2부로 엮어져 있다. 먼저 1부를 다뤄보자. 1부에서는 방법론에 해당하는 1장과, 내용에 해당하는 종교의 '본질'을 다루는 2장, 범라주는 이름으로 종교의 '형식'을 다루는 3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틸리히의 종교철학 방법론은 하나님의 행위로서의 '계시'와 인간의 행위로써의 '종교' 사이의 역학에서 '계시에 대한 교리'와 '종교를 다루는 철학' 사이의 종합적 해결책을 모색할 필요성과 가능성을 논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보다 더 구체적으로는 의미실재, 즉 스스로를 의미로 드러내는 실재로 접근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실재가 의미를 드러내는 데에 있어 지닐 수밖에 없는 한계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의미 한계가 실재에 의한 것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실재에만 일방적으로 우선권을 부여했던 (고대) 형이상학을 넘어설 뿐만 아니라 의미만을 부각시키는 무정부적 상대주의도 배격하면서 있음과 삶 사이의 얽힘이 지닌 긴장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시작하는 것이다. 종교철학이 다루어야 하는 현실은 그저 있음이기만 있음이 아니라 삶으로 새겨지는 있음일진대 이때 있음이 삶으로 부득이 한계 지어질 수밖에 없으니 이를 겸손하게 비판적으로 새겨야 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삶을 통하여 있음을 성취시키는 앎의 과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있음을 가리키는 실재 또는 존재, 삶을 뜻하는 의미, 이를 잇는 앎에 해당하는 인식으로서의 정신 중 어느 하나만으로 축소되거나 환원되는 것을 철저히 거부하는 비환원주의의 방법론을 시작부터 구축한다. 현실에서 본질이라는 이름으로 오는 존재인 있음과 현상으로 새겨내는 인식인 앎이 서로 흡수하거나 환원하지 않고 여전히 긴장을 유지하면서 삶을 엮어가니 이런 구도로 계시와 종교의 관계가 엮여야 한다는 것이다.

 틸리히는 근대 후기까지 지배해왔던 동일성 및 이를 위한 일방성의 억압을 해결하는 방안을 모색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 현실적 대립의 모순을 정직하게 직시하면서 나름대로의 가치를 인정한다. 그러나 대립이 벌이는 모순이 각 대립항이 스스로를 가두는 부분적 환원에 의한 것임을 드러내고 이에 의한 모순의 왜곡을 교정하기 위해서 이를 포함하고 초월하는 방식으로 역설을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다.

 

종교의 본질 - 요소와 그 얽힘을 중심으로

 

 틸리히는 1부 2장에서 '종교의 본질'이라는 제목을 달고서 종교의 본질, 진리, 의미를 논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여기에서 본질은 실재라고 새겨도 좋을 것이다. 결국 실재, 진리, 의미를 순환적으로 논의하는 것이다. 실재가 있음이고 진리가 앎이며 의미가 삶이라고 다시 읽을 수 있으니 1절은 종교의 있음과 앎 그리고 삶을 다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전통적으로 실재부터 시작하여 앎과 삶으로 서술하는 양식을 뒤집어 삶에서 시작해서 이를 토대로 있음과 앎의 관계를 논한다. 계시의 실재를 계시의 의미로부터 시작할 뿐 아니라, 신의 실재도 신의 의미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실재가 의미를 준다고 하는 실재론, 의미를 부여한다는 관념론 그리고 이를 싸안아 의미를 완성시키는 메타논리로 구별함으로써 그의 메타논리 방법이 주객 구도를 포함하되 넘어서는 구도임을 다시금 강조한다.

 틸리히는 실재는 진정한 상징만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상징은 사물의 본질을 적절히 표현할 수 없을 때 사용되는 부적절한 표현 형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실재에 대해 상징일 수밖에 없는데 상징조차도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상징이 부적절하게나마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여기서 의미가 중요하게 부각된다. 상징이 실재와 관련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의미이기 때문이다. 의마가 삶을 가리키고 존재가 있음을 가리키기 때문에 삶을 드러내면 거기에서 있음이 드러난다고 그는 주장한다. 틸리히는 의미로 시작하여 의미로 실재와 진리를 아우르려고 한다. 

 후설의 현상학에서는 현상 안에 본질이 있다고 말한다. 즉, 앎 속에 있음이 있다고 말한다. 현상이 앎이고 본질이 있음이다. 그러니까 앎을 잘 붙잡으면 그 안에서 있음이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현상은 저쪽에서 이쪽으로 쏴주는 것이다. 후설에 의하면 우리는 그걸 다만 직관의 방식으로 알 수 있게 된다. 틸리히는 이쪽에서 저쪽을 향해 지르는 비판뿐 아니라 저쪽에서 이쪽으로 향해 오는 것에 대해서 열고 받아내는 직관도 필요하다고 한다. 그것을 한꺼번에 싸잡는 것이 메타논리이고 메타논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의미이다. 이쪽에서 저쪽만도 아니고, 저쪽에서 이쪽만도 아닌, 이쪽과 저 쪽이 만나는 상호관계성이다.

 종교와 문화도 마찬가지이다. 종교는 무한한 의미이고, 문화는 유한한 형식의 관한 지향성이다. 또는 종교는 문화의 실체적 내용이고 문화는 형식이라고도 한다. 이 둘의 균형이 깨지게 되면 문화는 자율로 치닫고, 종교는 타율로 전락하는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신율이 요청된다. 자율과 타율은 신율 안에 긴장을 유지한 채 포함되고 결국 초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율-타율-신율의 삼각구도 속에서 자율과 타율은 대립을 모순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어느 한쪽으로 쏠리는 환원주의에 의한 왜곡과 소외를 극복하고자 이를 긴장을 유지하고 넘어서는 역설로 이끌어 가려는 그의 과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일상적인 것에서 동떨어진 궁극성이 아니라 일상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온갖 긴장과 갈등에 주목하여 각각의 장점을 살리고 문제 가능성을 보완하는 데에서 궁극성이 의미를 지닌다는 방식으로 연관 짓는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서 궁극성은 역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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