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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분석심리학자 칼.G.융이 좋아했던 '장인의 샘' 이야기로 우리를 그림자의 세계로 초대한다.
물길을 내기 위해 특별히 애를 쓰지 않아도 어딘가로 끝없이 흐르는 생명의 물이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생명의 물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다투게 된다. 기어코 특정한 사람만 생명의 물을 마실 수 있는 법까지 만들게 된다. 그러한 모습을 못 마땅하게 여긴 생명의 물은 원래 흐르던 길이 아닌 다른 어딘가로 물길을 바꾸게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생명의 물이 다른 곳으로 간 것도 모르고 싸우기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소수의 사람들은 생명의 물이 마른 것을 알고 새로운 생명의 물을 찾아 나서는 모험을 한다.
이 이야기는 자아(ego)중심적인 사람들이 진리를 어떻게 악용하고 퇴락시켜왔는지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참으로 경이로운 대목은 샘물이 항상 어딘가에서 다시 솟아 흐른다는 사실이다. 또, 생명의 물을 찾으려는 용기있는 지성인들에게는 저마다 시대에 맞는 모습으로 이 물을 이용할 수 있게 허락된다는 것이다.
자아중심적인 삶에 빠져서 인간의 영혼에서 기대하지 못 하고 있던 원천 중 하나가 '그림자'이다. 그림자의 존재가 당혹스럽게 여겨지겠지만 그림자는 할상 우리 곁에 존재한다. 이 책은 자기 자신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수용하는 심오한 영적수행의 여정으로 초대하고 있다.
1장 그림자
1-1 그림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그림자는 우리 자신의 일부이지만 스스로 거부하거나 억압해온 내면이다.
인간은 성장과정 초기에 선악과를 따먹는다. 그 결과로 아담과 하와 이후 모든 사람들에게 원죄를 심어주게 된다. 성경에 나오는 이 선악과 이야기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는 문명화 과정 즉, 가치판단의 기준을 학습하는 순간부터 우리의 온전함과 분리된다는 것이다. 문명화 과정을 통해 신이 우리에게 부여한 온전한 특질 중에서 사회가 수용할 수 있는 것과 수용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작업이 일어난다. 이 과정에서 사회가 거부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특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 내면의 어두운 구석에 차곡차곡 쌓여간다. 이런 특질을 오랜 시간 숨겨놓으면 이 어두운 특질이 자체의 생명력을 갖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그림자의 삶이다. 즉, 그림자는 우리의 의식으로 적절하게 통합되지 않은 부분이며 우리가 멸시하는 부분이다.
집단 문화는 우리에게 어떤 특정한 양식에 따라 행동할 것을 요구한다. 이를 심리학적 용어로 설명하자면, 자기(Self)에서 자아(ego)와 그림자(shadow)가 분리되는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온전한 모습으로 있던 인간은 특정한 양식(선과 악의 구분)이 생겨남으로 더 이상 온전한 상태로 존재하지 못 하고 분리되는 것이다.
저자는 세계여행을 하면서 어떤 특질은 자아에 덧붙여지고 어떤 특질은 그림자에 부가되는지 흥미있게 관찰한 결과를 소개해주고 있다. 문화는 필수 불가결 한 것이지만 그것이 '인위적'으로 구축된 구조라는 사실에서 각 나라의 차이가 분명하게 나타난다.
서양에서는 남녀가 손잡고 것는 것이 자연스럽고 남자들끼리 손을 잡고 걷는 예는 드물다. 반면 인도에서는 남자들끼리 손을 잡고 걸어도 남녀가 손잡고 걷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서구사회는 공식적인 자리나 종교적인 장소에서 신발을 신어 존경을 표현하지만 동양에서는 절이나 집 안에서 신발을 신고 있으면 무례하게 여긴다. 서양에서는 밥을 먹고 트림하는 것을 버릇 없는 것으로 간주하지만 중동에서는 밥을 먹고 나서 만족감을 표하기 위해 트림을 한다. 서양에서는 제자의 연구를 교수자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것을 표절로 여기지만, 중동에서는 무욕을 덕목으로 여기기 때문에 위대한 대가의 문하에서 공부한 학생들이 자기 작품에 자신의 서명대신 스승의 이름을 적는 것을 발견 할 수 있다.
위의 예에서 보았듯, 문명화 과정에서 진행되는 이 분리과정은 대단히 임의적이고 개인적이다. 어떤 지역에서는 최고의 덕목으로 간주되는 것이 다른 지역에서는 가장 나쁜 죄가 된기도 한다. 즉, 선한 특질이 그림자로 둔갑할 수도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심리에서 순수한 금이라고 할 수 있는 소중한 것이 그림자로 둔갑한다. 우리는 종종 사회에서 거부된 특질에서 고상한 면을 발견하고 이에 저항하느라 큰 에너지를 쏟는다. 그림자 속에 들어 있는 금을 찾아내서 자기 것으로 만들라고 하면 경악을 금치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내면의 금을 무시하는 것은 내면의 어두움을 무시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하다. 이는 우리 내면의 전일성을 깨지게 하고 분리된 삶을 살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면의 금을 찾아가는 여정을 통해 삶의 전일성을 회복해야 한다.
1-2 빛과 그림자의 균형 잡기
빛을 밝히는 것은 곧 그림자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바른쪽에 치우친 행위를 했다면 그 반대편 행위로 시소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
우리는 신에게서 부여 받은 삶의 특질을 어느 하나도 버릴 수 없다. 다만 시소게임을 할 뿐이다. 우리는 사회화 과정을 겪으면서 신에게서 부여받은 개별적인 특징 중 사회가 수용하는 면은 시소의 오른편에, 그렇지 않은 면은 시소의 왼편에 옳려 놓을 뿐이다. 하지만 사람이 평상심을 유지하려면 시소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바른쪽에 드러나는 특질을 선호한다면 그 반대쪽에도 동일한 무게를 지니는 뭔가로 균형을 맞춰줘야 한다. 역으로도 마찬가지다. 만일 이 법칙이 깨어지면 시소가 뒤집혀 균형을 읽게 된다. 우리는 살면서 종종 180˚ 급변 하는 사람들을 보곤 하는데, 시소가 뒤집히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또, 시소 위에 너무 많은 것을 올려놓아서 지렛대가 부러질 수도 있다. 이 상태를 정신이상이나 신경쇠약이라 부를 수 있다.
지렛대나 시소의 중앙은 온전하고 신성한 지점이다. 우리는 모두 외부세계와 관계할 때 잘 훈련된 선한 면을 드러내야 하는데, 이는 좌우측의 균형이 잘 유지될 경우에만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각자 어두운 면을 밖으로 드러내서는 안 된다. 마구 드러낸다면 세상은 피로 굶주린 상소로 변할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한테 자기의 어두운 면을 숨기려 들어서는 절대 안 된다. 진정 성인의 자질을 갖추려면 시소의 중앙에서 한쪽의 무게와 비슷한 무게를 반대쪽에도 쌓아야 한다.
자아와 그림자는 같은 원천에서 만들어지고 서로 정확한 균형을 이룬다. 빛을 밝히는 것은 곧 그림자를 만드는 것이다. 다른 하나 없이 서로 존재하지 못 한다. 자시느이 그림자를 소유한다는 말은 신성한 자리인 내면의 중심에 도달하는 것인데, 이 방법 외에는 어떻게든 내면의 중심에 도달할 길이 없다. 이 과업을 성취하지 못하면 성숙해질 수 없고 또 삶의 목적을 발견할 수 없다.
그림자를 의식적으로 제어하지 못 하면 다른 사람에게 투사하는 경향성이 있다. 창조적인 남성들의 그림자에 대한 대가는 그 곁에 머무르는 여성이 치르는 경우가 빈번하고, 또 창조적인 여성의 어두운 면, 곧 창조의 부산물 때문에 에너지가 고갈되는 남성들도 많이 있다. 최악의 경우는 창의적인 부모의 그림자가 자녀들에게 전가되는 경우다. 성직자가 있는 가정의 자녀들이 어려움을 겪는다는 이야기나, 부유한 부모를 둔 자녀들이 오히려 의미 있는 삶을 살기 힘들다는 것은 어느 정도 알려진 사실이다. 게다가 문명의 발달은 우리들의 고통을 가중시킨다. 연구자들의 추정에 따르면 오늘날 평범한 가족이 기계의 도움으로 해결하는 일은 과거의 하인 28명이 해낼 수 있는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룩한 효율적인 사회의 정 반대편에는 권태와 외로움이란 그림자가 불가피하게 등장한다.
1-3 상징적 행위로 삶의 균형 이루기
우리는 의례나 의식을 통해 균형을 되찾을 수 있다. 폭력이 난무하는 삼류소설 한 편을 쓰거나 명상을 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시소의 균형을 잃지 않으면서 아름다움과 선함을 가꾸는 방법은 의례이다. 의례를 통해 이 파괴적인 면의 실체를 인정한다면 용기를 가지고 이상을 실현하고 자기 일을 해낼 수 있다. 무의식은 '진짜' 행위와 상징적인 행위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한다. 이 말은 아름다움과 선함을 추구하면서 이에 필수적으로 뒤따르는 어두움은 상징적인 방식으로 다룰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창의적인 만큼 파괴적이어야 하고 밝은 만큼 어두워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어디에서, 어떻게 이 어두움에 대한 값을 지불할 것인가는 어느 정도 제어가 가능하다. 창조적인 일을 한 다음에 곧바로 의례나 의식을 치르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균형을 되찾을 수 있다. 의례는 혼자서 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면 주변에 있는 누군가를 괴롭힐 필요가 없어진다. 대부분의 종교의례들 역시 이러한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카톨릭 미사는 어두운 그림자로 가득하다. 근친상간, 배반, 거절, 고문, 죽음 그 이상의 것들도 있다. 이 어두운 면은 선명하게 드러나는데, 결국 이 모든 것들은 계시로 인도된다. 이 지독한 측면이 주는 균형효과로 인해 죄가 사해지는 것이다.
자신의 특질중에서 어두운 면을 부정하고 거부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내면의 다른 곳에 그 어두움이 저장되고 축적된다. 이것이 나중에는 우울한 기분, 육체적, 심리적 질병 혹은 무의식적으로 고무된 사건이나 사고로 나타날 수 있다. 우리가 빛은 숭배하고 어두움을 거부하여 축적된 면들이 현재 우리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런 잔재가 바로 정쟁이나 경제적 혼란, 파업 그리고 인종차별 등으로 드러난다.
좋든 싫든 우리는 어두운 측면을 갖게 되고 그 어두운 측면은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분출되게 되어있다. 즉 우리는 어찌되었든 온전해야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위엄을 가지고 그림자를 의식적으로 통합할 것인가 아니면 신경증적 행동으로 표출할 것이냐이다. 인류 내면에 있는 투사의 기제가 강하게 작용하면 외부에서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 현대 심리의 가장 위험한 면은 바로 자신의 그림자를 우리가 아닌 '그들', 즉 이웃이나 다른 민족 혹은 다른 문화에 속하는 사람들에게서 발견하려는 것이다. 그 결과 지난 세기에 세계대전이 두 차례나 발발해서 현대세계가 이룩한 가장 소중한 것들을 송두리째 파괴했다.
누구나 개인적으로는 전쟁을 비난하지만 집단이 되면 전쟁을 일으키는 쪽에 찬성한다. 이런 파괴와 혼란을 초래한 주체는 괴물 같은 이상한 존재들이 아니라 집단의 그림자였고, 우리 모두 예외 없이 그림자 형성에 기여했다.
(니버의 도덕적 개인과 비도덕적 사회가 시사하는 바를 다시 한 번 보여주는 대목이다.)
1-4 그림자 투사하기
의식적으로 그림자 작업을 하지 않으면 그림자를 남에게 투사하게 된다. 이것은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을 회피한다는 뜻이다.
의식적으로 그람자 작업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그림자를 저도 모르게 투사하게 된다. 이 말은 자기 그림자를 다른 사람이나 다른 뭔가에 슬쩍 내려놓아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을 회피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내면의 어두움을 바깥세계의 몫으로 돌릴 때, 인간의 심리는 전일적인 것이 아닌 부분적인 것으로 머문다. 본래 의식 속에 동화시키는 것보다 투사를 하는 것이 쉬운 법이다.
인간 역사의 어두운 장은 타인에게 자신의 그림자를 전가할 때 펼쳐진다. 남자가 여자에게, 백인이 흑인에게, 카톨릭이 개신교에게, 자본주의가 공산주의에게, 무슬림이 힌두에게 그림자를 투사한다. 이웃 간에도 이런 일은 이러난다. 한 가족을 희생양으로 택하여 마을 전체의 그림자를 그 가족에게 짊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사실 이웃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집단이 무의식적으로 구성원 중 한 사람을 왕따로 만들어 그로 하여금 공동체의 어두움을 혼자 감내하게 만든다.
그림자를 전가하는 최악의 상태는 부모의 그림자를 자녀들에게 짊어지게 하는 것이다. 물론 누구나 성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하기 전에 부모의 그림자를 벗어던지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만일 부모가 자신들의 그림자를 어린 자녀에게 부가하는 경우, 자녀의 마음은 분리된다. 자아와 그림자의 전투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자녀들은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짊어지는 그림자보다 훨씬 더 큰 그림자를 성장기에 감당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이 결혼을 하면 다시 자녀들에게 그림자를 전가하려 든다. 인간의 죄가 삼대에 걸쳐 이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전가하는 그림자 투사를 내가 거부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의 답은 할 수 있다인데 자기 자신의 그림자를 합리적으로 잘 다룰 수 있으면 가능하다. 대개 다른 사람이 그들의 그림자를 내게 전가하는 경우, 내 안의 그림자가 폭발하여 전투가 불가피해진다. 이때, 내가 내 그림자를 잘 다룰 수 있다면 상대가 투사하는 그림자 싸움에 대응하지 말고 싸움꾼이 그냥 지나치도록 내버려두면 된다. 결고 맞서 싸우지도 말고, 얼음장 같이 싸늘하게 대하여 고독하게 만들어서도 안된다. 그저 단지 평소의 모습을 굳건히 지키면 되는 것이다.
1-5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의 부활
<파우스트>는 자아가 부활하기 위해서는 그림자도 동시에 부활해야 함을 역설한다. 그림자든 자아든 서로를 돌보지 않고서는 변형을 이룰 수 없다.
자아와 그림자가 만나는 문학작품의 백미로는 단연 괴테의 <파우스트>를 들수 있다. 파우스트는 자아와 그림자의 간극이 삶을 지속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서 자살을 기도한다. 시소가 부러질 정도로 하중이 적재된 것이다. 이 때 파우스트는 자신의 그림자인 악마 메피스토펠리스를 만나게 된다. 메피스토도 파우스트만큼이나 악마로서의 삶을 지속하기 힘든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들의 대화는 둘 모두에게 자아와 그림자의 부활에 관한 최고의 가르침을 제공한다. 생명력이 소진된 파우스트는 마침내 구원을 받아 열정을 지닌 붉은 피의 소유자로 변모한다. 비도덕적인 삶에서 구원되어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찾게 된다.
그림자와 자아는 충돌을 통해 본래의 전일성을 되찾는다. 이는 분리된 천당과 지옥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이기도 하다. 자신의 그림자를 회복하여 우리가 거부했던 특질을 부활시키는 것이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1-6 그림자 안에 숨겨놓은 황금
우리가 영웅에게 빠져드는 것은 내 안에서 숭고한 특질을 발견하는 것보다 멀리서 남을 추앙하는 것이 쉽기 때문이다.
그림자는 우리 각자의 내면에서 수용되지 못 하는 어두운 부분이라고 말했다. 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자질을 다른 사람이나 상황에 투사할 수도 있다고 언급했다. 우리가 영웅을 숭배하는 것은 순전히 그림자 때문이다. 이 경우 우리가 지닌 최고의 특질을 자기 것으로 수용하지 않고 타인에게서 그것을 보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투사를 통해 다음 단계의 성장과제를 인식하게 되고, 이런 방식으로 발달이 이루어진다. 오늘 영웅시 시한 것이 내일이면 자기성격이 되는 것이다. 마치, 14살짜리 아이가 16살짜리 아이를 영웅시하고 따르며 곧 동화되어 얼마 전까지 그림자로 치부했던 자기 특질이 살아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융은 분석을 할 때 이렇게 경고했다. "환자의 벽장 속에서 해골을 끄집어내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지만, 그림자로부터 황금을 끄집어내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 사람들은 자신의 어두운 면 못지 않게 자신의 고귀한 가능성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만일 여러분이 누군가의 내면에서 황금을 발견한다면 상대는 온 힘을 다해서 저항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영웅에 빠지는 이유다. 내 안의 그림자에서 고귀한 특질들을 발견하는 것보다는 멀리서 영웅을 추앙하는 것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그림자를 타인에게 투사하면 두 가지 면에서 잘못될 수 있다. 우선, 자기의 어두움을 타인에게 전가하여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안의 밝은 면을 전가해서 자기 대신 상대방이 영웅이 되어주기를 원한다. 이 경우에도 상대에게 대단히 무거운 짐을 지우게 된다. 다음으로는 자기 그림자를 내던져버림으로써 스스로 황폐해진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성장과 변화의 기회를 상실하게 되며, 황홀경을 경험할 지렛대의 중심을 놓치게 된다.
1-7 그림자 속에서 찾는 중년의 에너지
중년기에 이르러 지쳐있을 때는 그림자와 접촉해보라, 그 속에서 에너지를 얻어 바르게 사용하는 법을 배운다면 삶의 새 장을 여는 계기가 된다.
중년이 되면 본의 아니게 시소의 양 끝을 오가는 삶에 지치게 된다. 그러나 우리에게 경각심만 있다면 중간지점이 최선이라는 깨달음도 얻게 된다. 중간지점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잿빛 타협의 장소가 아닌 황홀경과 기쁨의 장이다. 중간지점은 오래 머무를 수는 없다. 찰나의 순간이다. 하지만 찰나적 체험만으로도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으며, 일상의 삶을 통하여 그 의미가 오래 연장되기도 한다. 누군가 찰나 이상으로 이 체험을 지속한다면 그 사람은 길을 잃게 되어 마침내 죽음을 맞을 것이라고 인도에서는 경고한다.
성인기의 초반부는 거의 전적으로 극기와 훈련에 헌신하는 시기다. 전문인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사회생활을 익히고 결혼생활을 유지해나가고, 수입을 늘린다. 이 모든 활동은 변함없이 커다란 그림자를 만든다. 문화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우리가 덮어두었거나 선택에서 제외했던 요소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중년에 이르면 문화화 과정은 거의 완결된다. 그런데 이 시기는 아주 메마르다. 마치 모든 에너지를 다 쥐어짜낸 듯한 느낌이다. 이 시점에 이르면 그림자의 에너지는 어마어마하게 커진다. 이때가 되면 우리가 그토록 애써 이룩한 모든 것을 한꺼번에 전복시킬만한 폭발력이 생긴다. 이 단조로운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랑에 빠지거나, 이혼을 하거나, 직장을 그만두는 파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 극단적으로 위험해지는 순간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림자에서 에너지를 얻어 그 에너지를 바르게 사용하게 된다면 이런 일들은 새 삶의 장을 열기 위한 무대 설치 작업이 될 수 있다.
1-8 의례로 그림자 표현하기
마리 앙투아네트는 화려한 궁정의 삶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외양간에서 소젖을 짜는 비천한 일을 시도했다.
의례를 통해 그림자에 접근하여 창조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의례를 치를 때는 자신의 심리에서 왼편에 놓이는 특질 하나를 찾아내어 이 특질에 걸맞는 표현을 해줘야 한다. 왼편에 있는 특질을 표현하면서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하거나, 단편소설을 쓰거나, 춤을 추거나, 불에 태우거나, 땅에 묻어버릴 수 있다. 이때 꼭 명심할 것은 물리적으로 표현은 하되 오른쪽에 있는 부분에 손상을 입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자기의 관점으로 볼 때 이 행위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외적이든 내적이든 그림자의 특질을 자아의 특질과 동등하게 살려낸다는 것에 있다.
시공간을 초월해서 세계의 의례는 대부분 파괴적인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희생제물, 소각, 의식으로 거행되는 살해, 피 뿌리기, 단식, 금욕 등이 그것이다.이러한 것들이 의례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상징적으로 값을 지불하여 문화를 안전하게 지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 물론 파괴적인 요소들을 근절시켜서 문화를 보호하려는 오류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파괴적인 요소를 편입하지 않고서는 문화를 활성화시킬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것이 진정한 의례 속에 빛 못지않은 어두움이 포함되어 있는 이유이다. 파괴와 창조, 악과 구원의 완전한 균형이 의례의 필수적인 요소인 것이다.
우리가 의례적인 양식으로 그림자에 목소리를 부여한다면 얼마나 많은 외부적 파괴행위를 피할 수 있었을지 그 누가 알겠는가? 서로 다른 대극을 수용할 용기를 갖춘다면 우리들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어둠속에서 황금을 발견 할 때 이상하게 저항이 생기기도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그 여정을 떠나야한다.
그림자는 우리 자신의 일부이지만 스스로 거부하거나 억압해온 내면이다.
빛을 밝히는 것은 곧 그림자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바른쪽에 치우친 행위를 했다면 그 반대편 행위로 시소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
우리는 의례나 의식을 통해 균형을 되찾을 수 있다. 폭력이 난무하는 삼류소설 한 편을 쓰거나 명상을 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의식적으로 그림자 작업을 하지 않으면 그림자를 남에게 투사하게 된다. 이것은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을 회피한다는 뜻이다.
<파우스트>는 자아가 부활하기 위해서는 그림자도 동시에 부활해야 함을 역설한다. 그림자든 자아든 서로를 돌보지 않고서는 변형을 이룰 수 없다.
우리가 영웅에게 빠져드는 것은 내 안에서 숭고한 특질을 발견하는 것보다 멀리서 남을 추앙하는 것이 쉽기 때문이다.
중년기에 이르러 지쳐있을 때는 그림자와 접촉해보라, 그 속에서 에너지를 얻어 바르게 사용하는 법을 배운다면 삶의 새 장을 여는 계기가 된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화려한 궁정의 삶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외양간에서 소젖을 짜는 비천한 일을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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