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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낭만적 사랑과 그림자
사랑에 빠진다는 말은 자기 안의 가장 고상하고 무한한 가치가 있는 존재를 다른 누군가에게 투사하는 것을 뜻한다. 사랑에 빠진다는 의미는 대부분 자신이 지니고 있는 신의 이미지를 상대방에게서 발견할 때의 체험을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상대에게서 보게 되는 신성(godhead)은 상대방의 내면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의 투사로부터 자유로워 지기전에는 상대방의 내면에 존재하는 신성을 볼 권리가 없다.
낭만적 사랑에 빠지는 경험은 일반적으로 사랑하는 느낌과는 다른 의미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훨씬 고요하고 인간적인 경험인 데 반해 사랑에 빠지는 것은 질풍노도와 같다. 낭만적 사랑에는 우리 의식보다 더 큰 무엇이 존대한다.
2-1 사랑에 빠진다는 심리적 의미
결혼은 대부분 투사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반드시 환상이 깨지는 시기를 겪는다. 이럴 땐 배우자는 맨 처음 투사 때와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사랑에 빠진다는 말은 곧 투사를 한다는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그림자 중 최고의 부분인 신의 이미지를, 남신이든 여신이든 상관 없이 투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이는 모든 숭고함과 신성함의 소유자가 된다. 이런 체험은 극단적으로 편향된 것으로 시소의 오른쪽에서만 벌어진다. 따라서 이 경험은 시소의 반대쪽에 그림자를 키우게 된다.
대부분의 결혼은 투사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반드시 이 환상이 깨지는 시기를 겪는다. 다행히 눈꺼풀에 씌인 것이 벗겨지면 우리는 훨씬 인간적으로 변한다. 인간적으로 변한다는 말은 결혼생활이 훨씬 견고한 실체를 기반으로 지속된다는 뜻이다. 사랑에 빠진 상태는 신에게 가까워지는 체험인 반면, 견고한 실체를 바탕으로 지속되는 사랑은 평범한 우리의 일상을 높이 끌어올린다.
우리가 인식하기는 힘들지만 사랑에 빠죠있는 동안은 사랑하는 사람의 인간성을 빼앗게 된다. 이는 우리가 상대를 진정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신을 투사하여 바라보기 때문에 일어난다. 하지만 신적인 체험은 두 사람을 위한 시간이 다 소비될 때까지만 지속된다. 그러다 어느 날 이들이 땅으로 되돌아올 때는 현실적으로 서로를 바라봐야 한다. 이 때부터 비로소 성숙한 사랑의 가능성이 열린다. 사랑에 빠진 남녀의 투사가 끝날 무렵 다른 쪽의 실체가 등장하는데 이 시기를 잘 견뎌낸다면 비로소 인간적인 사랑을 할 수 있다. 인간의 사랑은 신의 사랑보다는 덜 짜릿 하지만 훨씬 안정감을 준다. 결혼생활을 발전시키느냐 이혼으로 끝내느냐는 그림자를 얼마나 의식하고 있는가에 달렸다.
자신의 연인이나 배우자에게 신의 이미지를 투사하는 것은 자신의 어두운 면인 두려움이나 근심거리를 투사하는 것만큼 위험하다. 과거에는 영적인 가르침으로 대하던 내용을 지금은 사랑하는 사람이 대신해주길 기대한다. 우리 자신을 새롭게 하고, 죄를 사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역할을 배우자가 해주길 바라는 것이다.
서구의 집단 무의식에 로맨티시즘의 개념이 맨 처음 등장한 때는 12세기이다. 동양에서는 이런 일이 훨씬 오래전부터 나타났는데 그것은 영적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만 제한적으로 허용되었다. 이 체험의 위대한 힘을 깨달았기에 이를 종교적인 삶에서만 제한하고 일상의 관계에서는 금했던 것이다. 일상의 인간관계는 이러한 신의 드라마를 살아낼 만큼 강한 인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서구에서 낭만적 사랑에 관한 자질은 상대적으로 최근에 등장했다. 이러한 자질이 등장하면서 서구에서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감정의 장이 마련되었다. 동시에 이전까지 몰랐던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통의 장도 펼쳐졌다.
서구 현대인은 12세기에 등장한 두 신화의 계승자들이다. 이 둘은 '성배신화'와 '트리스탄과 이졸데 신화'이다. 성배신화는 개성화와 영성의 문제를 다루고, 트리스탄과 이졸데 신화는 낭만적 사랑의 힘을 우리에게 소개한다. 두 신화 모두 인간이 직접 체험한 신과의 관계를 그리고 있다. 이 두 신화가 탄생하기 전, 서구인들은 늘 집단이라는 틀 안에서 신의 위대함을 경배했다. 그러나 12세기 들어 인류는 개인적인 방식으로 강렬하게 신을 체험하는 엄청난 가능성을 맛보게 된다. 이 두 신화를 이해하면 현대인의 딜레마를 이해할 수 있다. 진정한 신화는 전체 문화를 읽어내는 맥락을 제공하고, 문화의 특질과 운명에 관해 주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신화는 우리에게 낭만적 사랑의 귀착지 중 한 곳을 보여준다. 또한 신성을 다른 인간에게 투사할 때 빠질 수 있는 함정에 대해서도 알려준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차원을 우리의 삶으로 끌어들일 때 발생할 수 있는 혼돈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게 해준다. 결혼생활이 유지되는 경우를 보면 이러한 강렬한 경험에서 벗어나 부부가 둘 다 인간적인 차원으로 내려와서 그들만의 사랑의 예술을 습득한 경우이다.
2-2 강렬한 로맨티시즘의 체험
사랑에 빠지면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겪었던 사랑의 고통을 답습하지만, 빛과 어두움을 다 끌어안으면 사랑의 경험을 환상이나 씁쓸함으로 끝내지 않아도 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신화에서 사랑하는 두 남녀는 문명의 보호막을 찢어버리고 인간이 머무를 수 없는 다른 차원으로 빠져든다. 이들은 우연히 사랑의 모약을 마시게 되는데, 이 묘약은 그들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엄청난 신의 힘으로 두 사람을 인도한다. 우리가 얻고 싶어하고, 그것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특질을 얻게 된 점은 감사한 일이지만, 이 특질은 너무 엄청나고 초인적인 것이라 우리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다.
사랑에 빠진 모든 커플들은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겪었던 고통을 답습한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관계의 기술을 발전시켜 우리의 딜레마를 극복하면, 이 문제와 관련하여 의식의 진화를 이룰 수 있다. 만일 우리가 빛과 어두움을 다 지닌 온전한 신의 광휘를 볼 수 만 있다면, 사랑에 빠진 경험을 환상이나 씁쓸함으로 끝내지 않아도 된다.
그림자 내면에 있는 힘을 소유하는 과제는 특히 도전적이다. 이 힘을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소유라는 관점으로 본다면 결코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자아는 아주 작아서 우리를 통제 불능의 과대망상에 빠뜨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힘을 다른 사람에게 투사한다는 것은 상대가 감당할 수 없는 초인적인 인물로 살아가도록 짐을 지우는 것이다. 이런 초인적인 힘과 타협하는 길을 찾는 것은 종교의 영역으로 남겨져 있다.
삶의 결정적인 순간에는 어떤 것이 나에게 속하고 속하지 않는지 항상 가려낼 수 있다. 이 결정의 시기에는 맑은 정신을 유지할 순간이 주어진다. 그러나 이 순간을 놓치게 되면 사람은 그 힘에 중독되어 힘을 악용하게 될 것이다. 이는 낭만적 사랑의 힘을 다룰 때도 다르지 않다. 강렬한 체험의 힘은 사람이 지속적으로 감당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에너지는 신에게든 땅으로든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고대세계에는 로맨스에 대한 환상이 없었다. 잠깐씩 일어나는 이런 감정은 신의 선물로 여겨졌다. 이들에게는 과대망상이 인간은 단지 신의 에너지를 매개하는 자에 불과했다. 오늘날 이 에너지는 우리 인간에게 주어졌다. 우리가 이 에너지를 보유하기 위해서는 의례가 필요호고 또 이 에너지를 바른 원천으로 되돌리는 법을 배워야한다.
2-3 모순을 추월한 역설의 위대함
어두움이 없는 빛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또한 여성성 없는 남성성이란 의미가 없다.
의식적으로 그림자에 접근할 때면 우리가 거의 보편적으로 멀리하고 피해왔던 자아의 강렬한 일면에 관하여 생각하게 된다. 바로 그 작업을 통해 우리는 마침내 역설의 영역으로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역설(paradox)이란 현대세계에서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의미를 길어내는 장인의 샘이다. 신화나 종교는 한결같이 알려지지 않는 장소나 가능성이 거의 없어보이는 장소에서 보물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준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최상의 보물은 가장 무시되어왔던 자리에서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이 힘든 역설을 계속 외면한 채 살아갈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를 거부하는 것은 스스로를 전혀 쓸모가 없는 모순 속에 살도록 가두게 된다.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어떤 힘겨운 고통도 감내할 수 있지만 의미가 없다면 견뎌내기 어렵다. 역사상 존재하는 종교적인 체험은 모두 역설로 표현된다. 모순은 고정되고 비생산적인데 반해, 역설은 은총과 신비를 위한 여지를 마련한다.
하지만 우리는 빈번히 실체의 역설적인 특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로 인해 의식을 하지 못하는 순간마다 마치 우리가 역설을 벗어나서 살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한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역설을 혼동한다. 일과 휴식은 그 경계가 느슨해지면 둘 다 망치게 된다. 다른 두 대극 사이에 사로잡히면 개인적 고통이 시작된다. 하나를 수용하면서 다른 것에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면 역서이 모순으로 전락한다. 그 때문에 서로 다른 두 대극은 동등하게 존중해야 한다.
서로 다른 두 대극 사이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역설에 도달하기는 매우 어렵다. 역설에 도달하기가 너무 어려워 역설을 싫어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역설은 대단히 직접적인 방식으로 일상의 틀을 넘는 실체에 대해 이야기해주며, 우리에게 가장 위대한 통찰을 제공해준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서로 대립되는 두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둘 간의 직접적인 대응을 피한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이러한 모순 속에 산다. 그렇지만 이런 환상은 반드시 깨어져야 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래야 한다. 편향된 균형을 단순히 못봇 체하고 살아갈 수는 없지만, 우리가 문제를 바라보는 방식을 바꿀 수 있다. 우리가 이 대극적인 요소를 받아들여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충돌을 의식으로 온전하게 견뎌낼 수 있을 때 역설을 수용할 수 있다. 역설을 받아들이는 능력은 정신적 강인함의 척도이자 성숙의 확실한 표식이 된다.
모순은 항상 대립하지만 역설은 신성하다. 상호모순에서 역설로 성장하는 것은 의식의 도약을 뜻한다. 따라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반대의 것들을 목록으로 만들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연습이 될 것이다. 목록을 작성한 뒤라면 역설의 회복을 꾀할 수 있다. 이 연습은 서로 다른 가치체계, 즉 일상에서 통용되는 실질적인 가치와 종교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가치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현대(서구)문화의 토대는 그리스도교인데 우리는 일요일마다 종교적 가치에 대해 듣는다. 설교 때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좋다라고 말하고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한다. 또 정신을 고양시키기 위해 단식을 권하고 누가 여러분의 빰을 때리면 다른쪽 뺨도 내어주라고 한다. 이 얼마나 모순적인가. 헌법은 자신의 방식을 택할 권리를 보장하는 민주주의와 자유를 토대로 제정되어 있지만, 종교적 가르침은 우리에게 개인적인 것보다 더 위대한 것을 위해 공헌하라고 한다. 종교에서는 자유의지가 아닌 신의 의지에 따라 지시를 내린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덕목은 그 반대되는 것으로 인해 타당성을 지닌다. 어두움이 없는 빛은 아무 가치도 없다. 여성성이 없는 남성성이란 의미가 없다. 버림 없이 돌봄의 가치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진실은 항상 다른 두 대극적인 쌍으로 이루어져 있고, 누구든 실체와 조화를 이루려면 이 대극을 견뎌냐야 한다. 고통을 받는다는 의미는 허용한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중성이란 신비로 인해 고통을 겪는다. 이것을 할 때마다 즉각 저것도 하게 된다. 이것이 실체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아 하는가?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는 이 명백한 모순 앞에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것이 바로 모든 신경증적인 해리와 심리학적 문제의 바탕이 되는 본질적 물음이다. 우리가 적절하지 못한 질문 속에 헤매게 된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신경증적 마비상태에 빠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수한 사람들이 당면해 있는 상태이며 이들이 겪는 고통은 극심하다. 즐거운 일을 선택하면 해야 하는 일 때문에 죄책감을 느껴 기분을 망친다. 해야 하는 일을 하려고 들면 자신이 원하는 것들에 관해 몽상을 하게 되어 참고 일하려던 자체심이 엉망이 된다.
이러한 고통은 '종교적'이란 단어를 잘못 사용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오류가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오류가 없었더라면 삶은 얼마나 견디기 어려울까? 종교(religion)란 '다시'라는 의미의 're'와 '연결되고 묶고 다리를 놓는다.'라는 의미를 지닌 'ligare'에서 유래되었다. 그러므로 종교란 '다시 함께 묶는다'라는 뜻이다. 이 단어를 결코 대극이 되는 쌍의 한 영역으로만 제한해서는 안된다. 예전에는 논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세속적인 태도와 종교적인 태도를 대비시켰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히 잘못된 틀을 사용한 것이며 대다수 인류가 신경증으로 고통을 받게 되는 바탕이다. 어떤 행동은 세속적이고 다른 행동은 신성하다는 생각은 언어를 아주 잘못 사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종교적인 행위, 혹은 특징들로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리를 놓고 치유를 하는 종교적 통찰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것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두 대극을 회복하고 화합하는 길이다. 종교는 큰 고통을 초래해온 분리를 넘어서게 하고 대극에 있는 둘을 다시 묶어주는 예쑬이라 할 수 있다. 종교는 큰 고통을 초래해온 분리를 넘어서게 하고 대극에 있는 둘을 다시 묶어주는 예술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서로 반대편에 있어 고통을 가중시키는 모순에서 벗어나, 단대되는 두 개념을 동시에 즐기면서 둘 다 동등하게 존중할 수 있는 역설의 영역으로 우리가 나아가도록 도와준다. 서로 반대되는 쌍의 한쪽을 종교적인 것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완전한 실수다. 종교란 단어는 합성의 영역에서만 가치를 지닌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종교는 말 그대로의 진정한 의미를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만 이 단어가 치유력을 되찾게 될 것이다.
2-4 역설이 삶에 가져다 주는 기적
우리는 역설을 통해서 대극적인 두 요소의 싸움이나 타협을 넘어선 단일한 눈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에너지를 대극에서 역설로 전환한다면 이는 인류 진화사에 있어 커다란 도약이 일어나는 순간일 것이다. 서로 대극이 되는 다른 두 가지 사이에 끼어 고통받는 삶이란, 살면서 어떤 문제나 사건이 일어났을 때, 해결책이 없는 상황에서 답을 찾으려 분투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역설은 이러한 고통의 삶에서 해결책이 되어준다.
서로 다른 두 가지 본능이 갈등을 일으키는 상황을 충분히 오래 견딜 수 있다면, 두 갈등이 서로에게 가르침을 주어서 둘 다 만족시킬 수 있는 전혀 새로운 통찰이 떠오를 것이다. 이는 타협이 아닌 심오한 이해의 차원이다. 이 통찰은 우리에게 삶을 조망하게 해주며 확시늘 가지고 해야 할 일을 인식하도록 도와준다. 인류에게 알려진 가장 값진 특질 중 하나가 바로 이러한 확신이다.
문제는 우리에게 숨겨진 통일성을 볼 능력이 없다는 데 있다. 당당하게 역설에 머무는 것이 통합의 권리를 얻는 것이다. 통합된 단일 비전을 갖는다는 것은 가장 신비롭고 고귀한 신학적 체험으로서, 이는 역설을 받아들임으로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역설과 공존할 때 대극적인 둘의 싸움이나 타협을 넘어선 단일한 눈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모든 에너지를 아주 작은 초점에 집중시키는 통합된 자세를 얻게 될 것이다. 이는 깨달음이란 단어만큼 값진 것이다.
2-5 사랑과 힘의 딜리마
하나를 포기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해답을 찾을 가능성을 앗아가버린다.
가장 화해하기 어려운 대극적인 한 쌍이 바로 사랑과 힘일 것이다. 사랑과 힘, 인간은 이 두가지 요소 중 어느 것 하나라도 없이는 삶을 영위하기 어렵다. 사랑 없는 힘은 잔인함을 드러낸다. 힘 없는 사랑은 취약하고 무미건조하다. 그러나 두 사람이 서로에게 가까워질 때 이들 사이에서 폭발이 일어난다. 연인이나 부부의 싸움은 대개 힘과 사랑이라는 대극적인 요소의 총돌과 관련되어 있다. 하나를 포기하는 것은 쉬운 해결책이다. 그러나 이런 해결책은 진짜 해답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합성의 가능성을 앗아버린다. 진정한 역설은 강한 헌신과 신비적인 결속을 가져오는데, 이런 헌신과 결속이 둘 사이에 발생하는 문제들을 인내하 힘을 부여한다.
2-6 그림자 감싸안기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찾아라. 다음 단계의 성장은 바로 그곳에서 일어난다.
그림자에 관한 이야기로 이 책이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역설과 그림자 사이에 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가?라는 질문이 들수도 있다. 역설은 모든 면에서 그림자와 연관되어 있다. 우리가 자신의 그림자를 소유하고, 그것을 가치있고 위엄있는 자리로 끌어올리고 나서야 비로소 고귀한 화합의 장인 역설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그림자를 소유하는 것은 곧 영성을 체험하는 장을 마련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성서와 세계 신화는 공통적으로 가장 평범한 장소나 사건에서 신성함을 발견할 수 있다고 가르쳐준다. 역설은 종교적 삶, 즉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위대한 비전을 준비하는 것이다.
심리상담을 받는 내담자들은 대단히 무안해하고 괴로워하면서 충돌하는 가치들을 꺼내놓는다, 이들은 대개 해결책을 원한다. 그러나 해결책 대신 역설을 감당할 만한 의식을 부를 수 있다면 더 커다란 것을 얻게 될 것이다. 융은 '상담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찾아라. 그의 다음 성장은 바로 그곳에서 일어난다.'라고 말했다. 자아란 망치와 모루 사이에 있는 금속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실질적으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질문을 한다는 자체가 여러분을 자기중심에서 멀어지도록 만드는데, 그 이유는 행위(doing)와 존재(being) 사이에서 둘 중 하나를 택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자아가 무엇인가를 할 수 없는 상태라면 의식적인 기다림을 통해 역설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 자아보다 더 큰 뭔가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역설에 동의한다는 것은 곧 고통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이는 자아보다 훨씬 큰 세계를 의미한다. 이러한 체험은 우리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느끼는 지점, 해결책이라곤 전혀 없어보이는 바로 그 지점에서 정확하게 일어난다. 이 순간 자신보다 훨씬 더 큰 곳으로부터 초대를 받은 순간이다.
결혼은 대부분 투사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반드시 환상이 깨지는 시기를 겪는다. 이럴 땐 배우자는 맨 처음 투사 때와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사랑에 빠지면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겪었던 사랑의 고통을 답습하지만, 빛과 어두움을 다 끌어안으면 사랑의 경험을 환상이나 씁쓸함으로 끝내지 않아도 된다.
어두움이 없는 빛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또한 여성성 없는 남성성이란 의미가 없다.
우리는 역설을 통해서 대극적인 두 요소의 싸움이나 타협을 넘어선 단일한 눈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를 포기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해답을 찾을 가능성을 앗아가버린다.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찾아라. 다음 단계의 성장은 바로 그곳에서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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