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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와 티베트에서 사용되는 산스크리트 용어 만다라(mandala)는 전일성을 표현하는 신성한 원, 혹은 테두리가 있는 장소다. 살아가면서 과중한 일을 해야하는 시기에 융은 균형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아침마다 만다라를 그렸다. 뿐만 아니라 많은 고딕건물, 그리스도교 미술 등 많은 곳에서 만다라는 치유의 상징으로 활용된다. 만돌라(mondarla) 역시 치유효과가 있지만 모양에 있어서 만다라와 어느 정도 차이를 보인다. 만돌라는 아몬드 모양인데, 동그라미 두개가 부분적으로 겹칠 때 형성되는 모양이다. 이 상징은 우리가 지금까지 다루고 있는 두 대극의 중첩 그 이상을 뜻한다.

 

출처 : http://omn.kr/5o6r

 

2-1 분열된 세계를 치유하는 힘

위대한 시는 도약을 통해 존재의 아름다움과 공포를 통합한다. 정반대라 생각했던 것 사이에 연결점이 있음을 깨닫는 것은 놀라움이자 충격이자.

 

 분열된 세계에서 만돌라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앞서 그림자를 고찰하는 동안 우리는 서로 대극을 이루는 쌍에 대해 논의한 바 있다. 긍적적인 가능성에 반하는 나쁜 가능성을 규정하고, 나쁜 것은 일소하여 흔적조차 찾지 못하는 우리 문화의 특질이라 말할 수 있다. 그렇게 버려진 요소는 그림자를 형성한다. 그렇지만 버려진 것들이 영원히 추방지에 머물러 있지는 않는다. 폐기되었던 요소들이 돌아와 한번 만나주길 요청할 때 바로 만돌라에 대한 이해를 시도 할 때이다.

 만돌라는 놀라운 치유력과 힘을 부여하는 기능이 있다. 만돌라는 우리들의 삶이 문화적인 것에서 종교적인 것으로 이동하도록 도와준다. 만돌라는 분리의 치유로부터 시작한다. 두 동그라미가 겹쳐지는 부분이 맨 처음에는 초승달만치 작다. 그러나 이것이 시작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중첩된 부분이 점점 커지고, 더 많이 겹쳐짐으로 써 치유가 완전해진다. 분열되고 전일적이지 않는 것은 신성하지 않다는 의미인데 만돌라가 이 분리된 조각들을 함께 묶는다.

 

2-2 만돌라, 치유의 예술

심오한 진리는 선이 악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만돌라는 두 대극을 화합하는 전형이며 갈등과 이중성에서 벗어나게 하는 우리의 안내자다.

 

모든 말은 만돌라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문장은 만돌라의 특질을 지닌다. 아름다운 문장은 분열된 세계를 통합하지만, 조악하고 빈약한 문법구조로 구성된 문장은 상처를 입힌다. 

 주 동사인 'be'동사는 대단한 통합기능이 있다. 'be'동사로 구성된 문장은 일치를 의미하며 이것은 분리된 두 요소를 치유한다. 나와 그 사람이 동일하다는 말은 서로 다른 두 존재를 신비적으로 통합한다. be동사처럼 명백하지는 않을지라도 각각의 문장은 모두 다 일치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동사는 모두 신성한 장을 만든다고 할 수 있다. 잘 다듬어진 문장을 사용하는 것은 곧 이원성에서 벗어나 통합을 이루는 길이다. 이는 엄청난 치유와 회복력을 지니고 있는데, 바른 언어를 사용한다면 우리는 모두 다 치유이며 시인이다. 진실을 말하는 순간마다 만돌라를 만들게 된다. 

 만돌라는 갈등을 해소하는 원형이다. 이는 치유의 예술이다. 일반적으로 화해할 수 없는 대극은 우리들에게 신경증적인 틀을 만들어 준다. 시인은 물론 우리 내면의 시인도 마찬가지로 이 두 극을 포개어 숭고한 온전함을 만들어낸다.

 만돌라 만들기는 언어 형태의 표현으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화가는 형과 색의 시각적 긴장으로 만돌라를 그리며, 음악가는 리듬과 형과 톤으로 만돌라를 창조한다. 만돌라는 또 춤으로도 표현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데 힘입어 대다수 서양인들은 만돌라를 연구하는 데 써야 할 에너지를 쓸모없는 죄책감을 다루는데 소비한다. 죄책감은 시간과 에너지 낭비다. 죄책감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의식적인 작업을 통해서만 만돌라가 만들어지고 치유가 일어난다. 만돌라에는 자책을 위한 여지가 없다. 또한 죄책감은 역설의 값싼 대용품이다. 우리는 죄책감으로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보다, 우리 안에서 충돌하고 있는 서로 다른 진실을 들여다보는 용기 있는 행위에 에너지를 집중하는 편이 훨씬 낫다. 

그리스도교의 만돌라 익투스

 

 

2-3 창조의 싹을 틔우는 신의 그릇

만돌라는 중립지역이나 타협의 장소가 아니라 삶의 색채가 화려하게 펼쳐지는 곳이다. 우리는 색체의 향연인 파바니스에 도달할 때까지 여정을 멈춰서는 안 된다.

 

인간의 삶은 만돌라로 볼 수 있다. 삶의 장에서도 두 대극적인 요소의 조화가 이루어진다. 이렇게 보면 인간은 모두 다 구원자들이며, 그리스도교는 이 과업을 이룩한 인간의 전형이다. 남녀의 만남도 모두 만돌라인데, 두 대극인 남성성과 여성성이 만나는 장이고 또 서로를 존중하는 장이다. 그러므로 만돌라는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지기 시작해 싹을 틔우는 신의 그릇이다.

 인간의 상황은 거듭해서 우리를 자아-그림자의 대극으로 나눈다. 우리가 사회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한 그림자를 짊어지는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회는 전쟁, 폭력, 인종차별 같은 집단 현상으로 그 값을 지불할 것이다. 종교적인 삶이 하늘과 지복천년같은 다른 영역을 내적 삶의 절정으로 이야기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문화와 종교는 목표가 서로 다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문화적 영향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그림자 작업을 할 필요가 있다.

 

 

 

위대한 시는 도약을 통해 존재의 아름다움과 공포를 통합한다. 정반대라 생각했던 것 사이에 연결점이 있음을 깨닫는 것은 놀라움이자 충격이자.

 

심오한 진리는 선이 악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만돌라는 두 대극을 화합하는 전형이며 갈등과 이중성에서 벗어나게 하는 우리의 안내자다.

 

만돌라는 중립지역이나 타협의 장소가 아니라 삶의 색채가 화려하게 펼쳐지는 곳이다. 우리는 색체의 향연인 파바니스에 도달할 때까지 여정을 멈춰서는 안 된다.

 

그림자, 낭만, 낭만적 사랑,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 로버트존슨, 분석심리학, 사랑, 심리학, , 페르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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